2017.10.20 (Fri) 03:19    
 
홈 > 칼럼/오피니언 > 사설

TOTAL ARTICLE : 81, TOTAL PAGE : 1 / 5
[456] 학생은 진보하고 선생은 보수하고
 용인춘추  | 2013·12·12 14:49 | HIT : 3,044 | VOTE : 446

이제 기말고사를 끝으로 대한민국 학생들은 긴 겨울방학에 들어간다. 학교를 떠난 학우들은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학교 바깥의 것들에 관심을 돌릴 것이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일이 사뭇 답답하여 학우들 방학이 우울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특히 대학생은 시대를 앞서가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지식인 집단인데, 어지러운 세상이 그 순수함과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생은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이번 방학엔 학우들 스스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관점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대학생의 아름다움은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을 함께 갖고 있는 젊음에서 비롯한다. 그 젊음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며 지키고 서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젊은 대학생의 진보적 사유와 진보적 행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한자어로 ‘진보’는 군사용어에서 생겨난 말이다. 󰡔육도󰡕라는 책의 「전보」(戰步)편에 ‘행마(行馬)의 진보(進步)’란 말이 있다. 꿋꿋하게 앞을 향해 전진한다는 뜻이다. 긴 인생의 전장에서 초년병으로서 젊은 대학생이 앞길에 놓인 삶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진보적으로 비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앞길의 상태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밟아본 적이 없는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병목과 위험과 실패가 있을 수 있다. 인생의 전장은 탄탄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경험이 많은 선생의 지도가 필요하다. 선생(先生)이란 나이가 많다는 뜻이다. 많은 길을 밟아왔기 때문에 선생은 학생들이 나가는 길을 미리 알고 가르치는 것이다. 좋은 길과 위험한 길을 잘 알려주고 좋은 길로 이끄는 것이 선생의 기본적 책무이다. 젊은이들을 무작정 나아가지 못하게 지키고 서서 보호한다는 점에서 선생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중국 한나라 때 동중서는 그의 󰡔춘추번로󰡕에서 ‘중용이야말로 천지간에 가장 아름다운 이치이므로 성인이 반드시 보수(保守)하는 바이다’고 말한다. 훌륭한 가치를 잘 지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선생이 보수적인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학생은 진보하고 선생은 보수하는’ 것이 당연한데, 세상이 혼란스러워 중심을 잡기가 무척 어렵다. 딛고 선 위치가 정확해야 진보할지 보수할지 입장을 정할 수 있는데, 지금 사회의 기반이 너무 어지러워 디딜 곳이 없다. 선생은 젊은 학생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므로 진보의 어름에 발을 디디고 보수해야 할 것이며, 학생은 선생의 길을 참고해야 하므로 보수의 어름에 발을 디디고 진보해야 할 것이다. 그 두 지점이 얼추 일치해야 좋은 교육과 좋은 가치관이 형성될 수 있으며, 그 지점을 잡아주는 것은 선생의 몫이다. 그런데 요즘 선생들 대부분은 진보의 어름이 아닌 보수도 한참 보수의 어름에 발을 내리고 있어서 젊은 학생들이 서있을 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괴리 때문에 길을 찾는 학생들의 존경하는 스승이 대학 안에 없는 것은 아닐까.

국내외 정세와 세상살이가 하도 급박하여 선생들이 입장을 선명하게 보여주지 못한 체 방학을 맞았다. 학생들은 선생의 보수를 깊이 참고하여 스스로의 진보를 확인하는 방학을 보냈으면 좋겠다. 국제적으로 남북한 관계의 경색, 중국과 일본의 갈등, 미국경제의 추락과 일본의 우경화, 중동의 민주화열풍과 최근 태국의 시위 등 복잡한 국제관계의 지형 속에서 대학생으로서 나는 어떠한 입장에 서 있어야 하는가? 진보라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며 선생의 입장은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뜨거운 인류애를 안고 생각해보자. 국내적으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을 둘러싼 갈등, 정치권의 심각한 우경화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대립, 국회 내의 정쟁과 공안몰이, 경기침체와 물가불안,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상업언론들을 보면서 어떤 입장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대학생으로 적절한 자세일까? 선생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논의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느 지점에 서서 얘기를 하는 것일까? 냉정하게 고민해보자.

생존경쟁과 취업전쟁이라는 현실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그냥 자본과 기업의 논리에 따라 스펙을 쌓고 외국어점수를 올리고 수 백 장의 이력서를 내고 슬프게 기다리는 것은 너무 보수적인 생각 아닐까?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분배를 위해 투쟁하는 조직에 가담하고 약자 입장에서 싸우는 단체를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것이 진보 아닐까? 대학은 학문하는 곳인데 나는 대학을 취업학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위치를 진지하게 되돌아보자. 내가 다니는 조직, 우리 학교는 문제가 없는가? 위태위태한 학교 위상의 문제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제멋대로 점수를 매기는 외부의 평가 때문일까,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내 등록금과 나의 영혼이 헛되이 버려지는 건 아닌가? 학생회일이라고 무관심해온 나의 잘못은 없는 것인가? 선생의 아름다운 보수를 무작정 신뢰한 젊은 지성으로서 나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차갑게 생각하고 덥게 반성해보자.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이성은 대학생의 무기다.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도 진보와 보수의 지점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진보의 반대말은 한자어로는 퇴보이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이다. 보수의 반대말은 한자어로는 개혁이며 정치적으로는 자유이다. 열정과 이성의 무기를 손에 꽉 움켜쥐고 퇴보하지 말고 자유로이 진보하기를 바란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되면 서 있을 지점을 확실히 아는 주체가 분명한 지성인으로 만나길 기대한다.